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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쉬어가는 자리

방전된 배터리와 걷는 하얀 고양이 <M-014>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굽은 소나무 숲길을 여유롭게 걸어가는 하얀 고양이의 뒷모습. 멀리 산책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며, 무기력증과 번아웃에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차분하고 몽환적인 아침 풍경입니다

"스윽, 바스락." 오전 7시 10분,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영신숲 공원 산책로입니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거꾸로 신은 양말을 주섬주섬 벗어 다시 신었죠.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축축한 흙내음에 뒷목이 절로 뻐근해지더라고요.

"아,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렇게 입 밖으로 툭 중얼거리고 나니 차라리 속이 좀 편해졌습니다.

멈춰선 경운기와 2+1 바나나우유

실은 어젯밤 11시 30분까지 지인들과의 모임 일정표를 짜고 예약 동선을 확인하느라 진을 뺐거든요. 그런데 아침 일찍 일행 중 한 명에게서 '갑자기 일정이 꼬여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네'라는 무심한 문자 한 통이 덜컥 날아왔습니다.

그 순간 제 안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마치 스마트폰 배터리가 1%에서 빨갛게 깜빡이듯,  제 감정 에너지도 완전히 방전되어 버린 거죠.

오늘 아침엔  편의점 알바생의 "봉투 필요하세요?"라는 말에 멍하니 고개만 젓고 나왔습니다. 제 손엔 무작정 집어 든 2+1 바나나우유 봉지만 달랑거리고 있네요. 뭔가 이렇게 무기력한 날엔 억지로라도 단 걸 욱여넣어야 이 안개 같은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목적지 없는 하얀 고양이의 산책

그렇게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휘어진 소나무 숲길 사이로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안개 속을 걷는 품새가 얄미울 만큼 참 여유롭더라고요. 쥐를 쫓는 중인지, 아니면 그냥 아침 마실을 나온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애초에 목적지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르죠.

"너도 참 바쁘게 살기 싫은가 보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녀석의 엉덩이에 대고 혼잣말을 툭 던져봤습니다. 저 멀리 안개 속으로 흐릿하게 멀어지는 누군가의 뒷모습도, 왠지 지금의 저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것만 같아 묘한 동질감이 들더군요.

멍때리기도 가끔은 스펙이 된다

이런 텅 빈 마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만 유난스럽게 겪는 건 아니겠죠? 남들은 다 멀쩡하게 엔진을 돌리며 잘만 굴러가는 것 같은데, 저 혼자만 멈춰 선 것 같아 덜컥 조급해질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억지로 엑셀을 밟는다고 바닥난 연료통이 채워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어쩌면 지금 제게 정말 필요한 건 대단한 회복 루틴이 아니라, 방금 본 저 고양이처럼 목적 없이 멍하니 걷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당장 내일 아침이라고 이 무기력함이 씻은 듯 사라지진 않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조금 뻔뻔하게 쉬어가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바나나우유에 노란 빨대를 푹 꽂아봅니다. 단맛이 식도를 타고 훅 넘어오네요.

다 마신 빈 플라스틱 통을 가볍게 흔들어 봅니다. '짤그락'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안개 속으로 조용히 흩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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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촬영 장소: 경북 문경시 흥덕동 영신유원지 (영신숲)

  • 이곳의 특징: 조선시대부터 오랜 세월을 품어온 문경 시민들의 보석 같은 쉼터입니다. 영강을 마주하고 선 수령 높은 나무들과 몽환적인 소나무 군락이 어우러져, 바쁜 일상 속 번아웃을 달래며 목적 없이 걷기 좋은 곳입니다. 봄이면 벚꽃 명소로, 평소에는 피크닉과 산책로로 사랑받는 다정한 숲입니다.

  • 촬영 시간: 오전 07시 07분 (일출 후). 빛이 완전히 숲을 밝히기 전, 짙은 안개가 소나무를 겹겹이 감싸 안아 차분하고 몽환적인 아침의 적막이 극대화되는 시간입니다.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11, 셔터스피드 1/200s, ISO 800 (Canon 24mm 광각 화각)

  • 촬영 팁: 24mm 광각 렌즈를 사용하여 안개가 내려앉은 소나무 숲의 깊이감과 굽어진 산책로의 여유로움을 프레임에 넓게 담아냈습니다. 조리개를 F11로 깊게 조여 안개 너머의 나무 질감까지 선명하게 살렸고, 흐린 아침의 부족한 빛은 ISO를 800으로 높여 안정적으로 보완했습니다. 1/200초의 셔터스피드를 확보하여 숲길을 유유히 걸어가는 하얀 고양이의 얄미운 꼬리와 발걸음을 흔들림 없이 또렷하게 포착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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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교
빛과 마음이 머문 순간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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