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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쉬어가는 자리

화려한 안장과 허물어진 마음의 성벽 <M-013>

푸른 하늘 아래 성곽과 정자가 있는 언덕에서 갑옷을 입은 갈색 말이 고개를 숙여 풀을 뜯고 있고, 그 뒤로 소나무 한 그루와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벤치에 앉아 생수병을 땄습니다. 미지근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도 가슴 한구석에 얹힌 답답함은 내려갈 줄을 모릅니다. 오전 내내 쏟아졌던 카톡 알림음과 "한 번만 더 도와달라"던 지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거립니다. 분명 거절하지 못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왜 제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을까요.

성벽 아래 묶인 말의 고독

성곽 아래, 화려한 갑옷을 두른 말 한 마리가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고 있습니다. 저 녀석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전장을 누비는 화려한 운명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거운 안장을 얹은 채 혼자만의 시간에 잠겨 있네요. 그 모습이 꼭 온종일 타인의 기대를 짊어지고 달리다 방전되어 버린 제 모습 같아 눈길이 멈췄습니다.

"아, 진짜... 나 또 이러네." 무릎을 탁 치며 혼잣말을 뱉었습니다. 남의 부탁에는 1초도 안 되어 "그래"라고 답하면서, 정작 제 마음이 "이제 좀 쉬고 싶다"고 보내는 신호는 3,500원짜리 편의점 영수증처럼 구겨서 버리고 살았거든요. 타인의 감정을 돌보느라 제 마음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흐릿한 경계선이 주는 생리적 통증

성벽의 돌 하나하나가 단단히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성벽이 견고한 건 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누군가 제 영역을 침범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 명치끝의 뻐근함은, 제 마음이 보내는 마지막 비상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스스로를 번아웃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 걸까요. 저 성벽처럼 단단한 경계선이 없다면, 제 안의 평화는 언제든 타인의 발자국에 짓밟힐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거절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겠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불안함을 억누르며 심호흡을 합니다. 호흡이 폐부 깊숙이 닿을 때마다 뻣뻣했던 어깨가 아주 조금씩 가벼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타인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은 차가운 외면인지 나를 지키는 일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안장을 내리고 홀로 걷는 길

완벽하게 인간관계의 달인이 되는 법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내일이면 또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억지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 말도 잠시 안장의 무게를 잊고 풀을 뜯듯, 저에게도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했으니까요.

조금은 불친절해지더라도 제 마음의 성문을 닫아걸 줄 아는 용기를 연습해보려 합니다. 거창한 선언은 아니더라도, 오늘 저녁만큼은 휴대폰을 뒤집어놓고 오로지 저만을 위한 고요한 시간을 선물해야겠습니다.

빈 생수병을 찌그러트립니다. '찌익' 소리가 정적을 깨며 묘하게 속을 시원하게 만듭니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성벽 너머로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지만, 가슴 속은 오히려 훈훈해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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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촬영 장소: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성

  • 이곳의 특징: 사계절 내내 탁 트인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산성입니다.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성벽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무너진 마음의 경계선을 단단하게 다시 세울 수 있는 힐링 명소입니다. 방문객을 위해 입구에 넓은 주차 공간이 아주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 촬영 시간: 오전 07시 54분 (일출 후).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이 차가운 성벽의 돌틈과 홀로 풀을 뜯는 말의 갑옷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아, 묘한 평안과 고요함을 선사하는 시간입니다.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10, 셔터스피드 1/100s, ISO 320 (Canon 24mm 광각 화각)

  • 촬영 팁: 24mm 광각 렌즈를 사용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웅장한 성벽의 선형과 푸른 하늘, 그리고 그 아래서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말의 모습을 한 프레임에 시원하게 담아냈습니다. 조리개를 F10으로 깊게 조여(팬포커스) 켜켜이 쌓인 성벽의 거친 질감부터 말의 디테일한 모습까지 전체적으로 선명하게 살려낸 것이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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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교
빛과 마음이 머문 순간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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