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 질 녘, 얇은 한지처럼 떨리는 연꽃
해 질 녘 오후 6시 15분, 낮은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습지 공원을 바라봤습니다. 낮 동안 화려하게 피어났던 연꽃들도 이제는 고개를 숙일 시간인데, 유독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역광을 받아 투명해진 하얀 꽃잎이 마치 얇은 한지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아, 예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꽃대 아래쪽을 보니 아주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매달려 있더군요. 남들이 보기엔 그저 꽃에 붙은 이물질일지 모르지만, 그 작은 생명에게는 이 커다란 연꽃이 온 세상이자 든든한 요람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가만히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오늘 점심때 단톡방에서 느꼈던 묘한 패배감이 떠올랐습니다. 새로 산 차를 자랑하는 친구, 아이의 성적표를 은근히 내비치는 선배의 메시지들. "나만 제자리걸음인가?" 하는 생각에 엄지손가락이 자꾸만 작아지더라고요. 그럴 땐 1,500원짜리 편의점 커피도 괜히 씁쓸하게만 느껴집니다.
타인의 정오, 나의 저녁
왜 자꾸 타인의 화려한 정오와 나의 고요한 저녁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하얀 연꽃은 옆의 분홍 연꽃과 자신을 비교할까요. 역광에 투명해진 제 꽃잎을 부끄러워할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그저 저녁 볕을 온전히 받아내며, 자기만의 색으로 빛날 뿐이죠.
"남들처럼 살아야지"라는 말은 참 무섭습니다. 그 기준에 맞추려다 보면 정작 '나'라는 존재의 결은 무시되기 일쑤거든요. 자존감이라는 게 대단한 성공에서 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남의 시선이라는 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내 마음의 생김새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부터가 시작이겠지요.
요즘은 나한테 말할 때 좀 더 다정해지려고 합니다. '왜 이것밖에 못 해?' 대신 '오늘도 애썼다'라고요. 낯간지럽지만 제법 효과가 있더라고요. 내 마음도 남의 집 귀한 자식 대하듯 귀하게 여겨야 그제야 기운을 차리는 모양입니다.
작은 수첩에 적은 것들
가방 속에서 굴러다니던 작은 수첩을 꺼냈습니다. 거창한 일기 대신 오늘 내가 해낸 작고 귀여운 일들을 적어봅니다. '퇴근길에 충동구매 참기', '점심 먹고 10분 걷기', '모르는 번호 전화 안 받기'. 적고 나니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낸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완벽하게 나를 사랑하는 법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또 누군가의 SNS를 보며 마음이 출렁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흔들리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중요한 건 흔들리더라도 다시 나만의 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겠죠.
해는 이제 완전히 산 너머로 숨었습니다. 공기가 제법 차갑네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끝에 닿는 편의점 영수증을 만지작거립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마트에서 세일하는 사과라도 한 봉지 사야겠습니다. 나를 위한 작은 선물치고는 꽤 달콤할 것 같거든요.
- 촬영 장소: 경북 상주시 이안면 지산리 백련재배단지
- 이곳의 특징: 수십만 송이의 새하얀 연꽃이 만개하여 마을 전체에 은은한 향기가 진동하는 아름다운 명소입니다. 그 장관을 렌즈에 담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가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마을 입구에 넉넉한 주차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어 편안하게 산책하며 사색을 즐기기에 아주 좋습니다.
- 촬영 시간: 오후 06시 18분 (일몰).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고, 부드러운 노을빛이 하얀 연꽃잎을 투명하게 물들이며 하루를 차분하게 마감하는 시간입니다.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8, 셔터스피드 1/400s, ISO 400 (Canon 188mm 망원 화각)
- 촬영 팁: 188mm 망원 렌즈를 사용하여 주변의 복잡한 배경을 과감히 덜어내고, 저무는 태양과 연꽃 한 송이, 그리고 줄기에 매달린 작은 생명에만 온전히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조리개를 F8로 조여 둥근 해의 형태와 꽃잎의 얇은 질감을 또렷하게 살렸으며, 노을의 역광을 활용해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 온전히 자기만의 빛을 발하는 연꽃의 실루엣을 따뜻하게 포착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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