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6시 20분, 회색빛의 숲
"스윽, 슥." 오전 7시 43분,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예천 금당실 솔숲. 안경알에 서린 뿌연 김을 옷소매로 닦아냅니다. 밤새 숲이 머금은 습기 탓인지 으슬으슬한 한기에 뒷목이 다 뻐근해지네요.
수백 년 된 굽은 소나무들과 안개가 엉켜, 주변은 온통 무거운 회색과 녹색뿐입니다. 저 역시 튀지 않으려고 거무튀튀한 바람막이를 입고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죠. 그런데 뷰파인더 안으로 '휙' 하고 낯선 피사체가 지나갑니다. 쨍한 노란색 셔츠를 입고 자전거를 탄 사람.
보호색을 입고 살았던 지난주
저 눈부신 노란색을 멍하니 쳐다보다, 불과 며칠 전 제 찌질했던 모습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3년 만에 나간 대학 동기들 모임 자리였죠. 다들 최근에 산 아파트 시세와 1인당 15만 원짜리 '오마카세' 예약 꿀팁을 떠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퇴근길 포장마차에서 파는 4천 원짜리 순대에 떡볶이 국물 찍어 먹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도, 행여나 혼자 뒤처지고 수준이 안 맞아 보일까 봐 "아, 거기 예약하기 진짜 힘들다며?" 하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도록 억지웃음을 짓고 집에 돌아오던 길, 어찌나 제 자신이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지던지요.
안개 속을 가르는 뻔뻔함
이런 남루한 마음, 저만 겪는 건 아니겠죠. 우리는 늘 무리에 섞여 들기 위해 자신만의 색깔을 지우고, 남들이 정해둔 기준이라는 안개 같은 보호색을 덮어쓰며 살아갑니다.
남들과 조금만 달라도 큰일 날 것처럼 불안해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저 자전거를 탄 분은 이 고요하고 무거운 무채색의 숲에서, 분위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샛노란 색을 뻔뻔하게 뿜어내며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물론 저분은 그저 편한 아침 운동복을 입고 나온 것일 텐데, 제 눈에는 마치 "남들 시선이 뭐가 중요해? 내 색깔이 이건데!"라고 시위하며 달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은 내 색깔대로
제가 당장 내일부터 저 자전거처럼 남들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고 노란 셔츠를 입고 출근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동기 모임에 나가면 또 쭈뼛거리며 속물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지도 모르죠.
수십 년간 남의 눈치만 보며 살아온 굳은살이 하루아침에 떨어져 나갈 리는 없으니까요. 다만, 내 몸에 맞지도 않는 회색빛 옷을 억지로 입느라 제 영혼까지 갉아먹는 짓은 이제 조금씩 줄여가고 싶습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폅니다.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네요. 장비를 가방에 챙겨 넣고 숲을 빠져나와 주차장 입구에 있는 낡은 자판기 앞에 섰습니다.
유명 카페의 비싼 커피는 아니지만, 지금 제게 제일 맛있는 걸 먹어야겠습니다. 지갑에서 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꺼내 밀어 넣습니다. '철커덕'. 달달한 율무차 한 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오늘따라 꽤 경쾌하게 들립니다.
📷 묵상을 담은 시선 (Photo Tip)
· 촬영 장소: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54 (상금곡리)
· 이곳의 특징: 조선 시대 '정감록'에서 전쟁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 중 하나로 꼽은 유서 깊은 전통 마을입니다. 고즈넉한 돌담길과 한옥, 그리고 99칸 저택터 등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특히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는 수백 년 된 천연기념물 송림은 그 속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로를 주는 힐링 명소입니다. (주차장은 솔밭 바로 옆에 있어 접근성이 좋습니다.)
· 촬영 시간: 오전 07시 43분 짙은 아침 안개가 소나무 숲을 삼키듯 내려앉아, 화려한 색채를 지우고 묵직한 무채색의 수묵화를 그려내는 가장 몽환적인 순간입니다.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11, 셔터스피드 1/25s, ISO 400 (Canon 67mm 망원 화각)
· 촬영 및 보정 팁: 67mm의 망원 화각으로 안개 낀 숲의 공간감을 촘촘하게 압축하고, 조리개를 F11로 조여 굽어있는 소나무들의 거친 껍질 질감을 선명하게 살려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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