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아침, 노란 은행나무 길
"바스락, 바스락." 충북 괴산 문광저수지. 발밑에서 은행잎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밤사이 내린 안개가 호수를 덮어, 물 위의 좌대는 희미한 실루엣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카메라 끈을 고쳐 매는데, 뷰파인더 너머로 파란 코트를 입은 여자가 강아지 두 마리와 산책을 나왔습니다. "옳지, 가자. 천천히." 강아지 줄을 쥔 손에 힘을 빼고, 안개 낀 호숫가를 느긋하게 걷는 뒷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이더군요.
행복은 멀리 있는 파랑새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는 '행복'을 찾겠다며 인터넷을 뒤적거렸습니다. '주말에 갈 만한 핫플레이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해외 여행지'. 화려한 사진들을 보며 "나만 이렇게 시시하게 사는 건가" 싶어 괜히 우울해지기도 했죠. 어제저녁 퇴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고급 승용차를 보며 한숨을 쉬었던 기억도 나네요.
이런 마음... 저만 겪는 건 아니겠죠. 행복하려면 꼭 비싼 티켓을 끊어야 하고, 특별한 곳에 가야만 한다고 믿는 마음. 그래서 정작 내 주머니 속에 있는 작은 사탕 같은 기쁨들은 까맣게 잊고 사는 날들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아침, 안개 낀 길을 걸어보니 알겠습니다. 행복은 저 멀리 안개 너머에 숨겨진 보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안개가 화려한 배경을 가려준 덕분에, 내 발밑에 수북이 쌓인 노란 은행잎의 색깔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온기면 충분합니다
주머니에서 텀블러를 꺼냅니다. 집에서 나올 때 급하게 타온 '맥심' 믹스커피지만, 쌀쌀한 아침 공기 속에서 한 모금 마시니 그 어떤 고급 원두커피보다 달콤합니다. '호로록-'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언 몸을 녹여줍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퇴근길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김동률의 노래, 편의점 'GS25'에서 2+1 행사로 산 초콜릿 하나, 그리고 주말 아침 늦잠 자고 일어났을 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줌.
이 소소한 것들이 모여서 오늘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고 있었는데, 저는 왜 자꾸 먼 곳만 바라보며 목말라 했을까요.
주머니 속 사탕 같은 행복
파란 코트를 입은 분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남은 커피를 마저 털어 넣습니다. 입안에 남은 믹스커피의 텁텁함조차 오늘은 왠지 싫지 않네요.
카메라를 가방에 넣으며 다짐합니다. 오늘 저녁엔 퇴근길에 꼭 제가 제일 좋아하는 떡볶이집에 들러 1인분을 포장해야겠다고요. "사장님, 오뎅 국물 좀 넉넉히 담아주세요." 넉살 좋게 웃으며 건넬 한마디를 상상하니 벌써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다시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저녁에 기다리고 있을 그 소소한 떡볶이 파티를 생각하며 버텨보려 합니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맵니다. 자, 이제 밥값 하러 가야겠습니다. 발걸음이 올 때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 묵상을 담은 시선 (Photo Tip)
· 촬영 장소: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양곡리 문광저수지 (은행나무 길)
· 촬영 시간: 오전 09시 14분 (일출 후 물안개가 부드럽게 걷히는 시간)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11, 셔터스피드 1/100s, ISO 320 (Canon 24mm 광각 화각)
· 이곳의 특징: 가을이면 호숫가를 따라 끝없이 늘어선 은행나무의 샛노란 물결이 유난히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이른 아침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물안개와 고즈넉한 낚시터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수많은 사진가의 발길을 이끄는 대표적인 가을 출사 명소입니다.
· 촬영 팁: 24mm 광각 렌즈의 특성을 활용하여 길게 뻗은 은행나무 길의 깊이감과 호수의 넓은 배경을 시원하게 담아냈습니다. 특히 조리개를 F11로 깊게 조여(팬포커스) 발밑에 깔린 은행잎부터 원경의 풍경까지 화면 전체를 선명하게 표현함으로써,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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