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기 물린 종아리를 긁으며
"헐, 맞다. 두부." 오후 6시 5분, 산길을 오르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내가 된장찌개 끓이게 들어올 때 찌개용 두부 한 모 사 오라고 했거든요. 근데 저는 지금 동네 산 위에 올라가 백로 사진을 찍기 위하여 멍하니 서서 백로 구경이나 하고 있습니다.
종아리가 간지러워 내려다보니 산모기가 아주 야무지게 물고 갔네요. 긁적거리면서 다시 백로 둥지를 봤습니다. 저기 멀리서 백로 한 마리가 입에 뭘 물고 날아오더라고요.
솔직히 처음엔 '쟤네는 좋겠다, 퇴근 시간도 없고' 뭐 이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다리는 뻐근한데, 눈앞의 저 새는 참 우아하게도 날더군요.
이게 뭐라고 눈물이 핑 도는지
백로 부리에 물린 게 뭔가 해서 자세히 봤습니다. 마른 솔방울 가지 하나였어요. 대박. 저거 하나 주우려고 하루 종일 그 고생을 한 건가 싶더라고요. 날개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이는데, 왠지 남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둥지 쪽을 보니 어린 새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목을 길게 빼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솔직히 좀 시끄러웠습니다. '아이고, 저 부모 새는 집에 가서도 쉴 팔자가 아니구나.'
그런데 백로가 둥지에 내려앉는 순간, 그 시끄럽던 울음소리가 뚝 그치고 묘한 평화가 찾아오더군요. 그냥 나뭇가지 하나 내려놨을 뿐인데 말이죠.
그 장면을 보는데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부인하고 싶지만, 요즘의 저는 그렇습니다. 집에 들어가기 전, 현관문 앞에서 한숨 한번 푹 쉬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거든요. 내가 가져가는 게 고작 내 지친 몸뚱이 하나뿐인 것 같아서, 기다리는 가족들 보기가 면목 없을 때가 많아서요.
썼다 지웠다 반복한 문장들
사실 방금 메모장에다가는 '숭고한 희생'이니 '가족의 사랑'이니 하는 멋진 말들을 적었었습니다. 근데 다시 읽어보니 너무 오글거려서 싹 지웠습니다.
저 백로가 무슨 대단한 사명감으로 날아왔겠습니까. 그냥 배고픈 새끼들이 기다리니까, 그게 밟혀서 꾸역꾸역 날개짓해서 온 거겠죠. 거창한 의미 부여보다는 그 짠한 본능이 더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기다림은 용기라기엔 좀 처절해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마냥 설레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약속 시간이 10분만 지나도 화가 나고, 카톡 '1'이 안 없어지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불안해하는 게 우리네 모습이니까요.
그런데 저 새끼 새들은 의심이 없더라고요. 그냥 입 벌리고 기다립니다. '엄마(혹은 아빠)는 무조건 온다'는 믿음 하나로요.
그 무식할 정도의 믿음이 저 백로를 다시 날게 만드는구나 싶었습니다.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다가도, 나만 바라보고 있는 그 눈망울들이 생각나서 다시 엉덩이 털고 일어나는 거죠.
그래도 갈 곳이 있다는 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립니다. [카카오톡] 아내: "올 때 메로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부 심부름도 까먹고 여기서 감상에 젖어 있었는데, 저를 기다리는 건 두부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이었네요.
백로는 둥지에 자리를 잡고 날개를 접었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날개를 접고 들어가야겠습니다. 빈손으로 가면 등짝 스매싱을 맞을 테니, 편의점부터 들러야겠지만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귀찮고 무겁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귀찮음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겠죠.
아, 맞다. 두부... '풀무원' 거 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찌개용이 부침용보다 부드러운 거 맞죠? 헷갈리네요.
얼른 뛰어가야겠습니다.
📷 묵상을 담은 시선
· 촬영 장소: 경북 경주시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경주) 뒤편 숲 백로 서식지
· 촬영 시간: 오후 06시 23분 (둥지로 돌아오는 분주한 저녁 시간)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9, 셔터스피드 1/2000s, ISO 640 (Canon 400mm 초망원 렌즈)
· 이곳의 특징: 백로는 깨끗한 환경에서만 서식하는 '환경 지표종'입니다. 캠퍼스 뒤편 숲은 수많은 백로 가족이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寶庫)이며, 교내의 넓은 주차 시설 덕분에 안전하게 탐조와 촬영을 즐길 수 있습니다.
· 촬영 팁: 1/2000초의 고속 셔터스피드를 확보하여, 둥지 재료인 나뭇가지를 물고 착륙하는 백로의 역동적인 날갯짓을 흔들림 없이 포착했습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헌신적으로 둥지를 짓는 어미와 아래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의 시선을 통해 '가족을 돌보는 사랑의 수고'를 이야기로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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