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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쉬어가는 자리

혼자만의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충전입니다 <M-011>

짙은 안개가 낀 호숫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하얀 우산을 쓰고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 고요한 물 위로 반영된 나무와 낚시 좌대가 어우러져 몽환적이고 평화로운 가을 새벽의 정취를 자아낸다

10월 하순, 새벽 6시의 알람 소리

"일어나야 해." 10월 하순, 새벽 6시.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습니다. 은행나무로 유명한 그 호수(저수지)의 풍경을 담으려고 벼르고 별러온 날이었거든요. 차를 몰고 1시간을 넘게 달려 현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와, 대박이다." 호수 전체가 뽀얀 안개에 잠겨 말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였습니다.

삼각대를 펴고 가장 적절한 자리를 잡았습니다. 셔터를 누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기다립니다. 수면을 흔드는 바람이 잦아들기를, 그리고 이 몽환적인 풍경에 방점을 찍어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그렇게 30여 분이 지났을까요. 거짓말처럼 하얀 우산을 쓴 여자가 뷰파인더 안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뛰더군요. 노란 은행나무 아래, 하얀 우산. 완벽한 순간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습니다. '찰칵, 찰칵.' 그렇게 한바탕 촬영의 열기가 지나가고 나자, 비로소 카메라 너머의 진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란함 스위치를 끄다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호수를 봅니다. 안개는 세상의 모든 배경을 하얗게 지워버렸습니다. 물과 하늘의 경계도, 건너편의 복잡한 도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노란 나무와 물 위의 고요함뿐.

어제까지만 해도 제 귀는 쉴 틈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울리는 광고 문자 도착음 , 골목에서 갑자기 터지는 개 짖는 소리 , 끊임없이 울려대는 '카카오톡' 알림음까지. 세상은 제게 1분 1초도 침묵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새벽, 안개 속에 서 있으니 강제로 '로그아웃'이 된 기분입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곳.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곳.

이런 마음... 저만 겪는 건 아니겠죠. 혼자 있는 게 외로워서가 아니라, 너무 시끄러운 세상에서 잠시 도망치고 싶어서 일부러 고립을 택하고 싶은 날요.

침묵은 빈 공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침묵을 두려워합니다. 혼자 밥을 먹을 때도 유튜브를 켜고, 이동할 때도 귀에 이어폰을 꽂아 무언가로 빈틈을 채우려 하죠.

하지만 안개 낀 호수 앞에 서 보니 알겠습니다. 침묵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를 소모하지 않고 오롯이 채울 수 있는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이더군요.

하얀 우산을 쓴 그분이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저도 숨을 죽이고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은 오히려 꽉 차오르는 기분입니다. 누군가의 위로가 굳이 말로 전해질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축축하고 조용한 공기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고 있으니까요.

혼자여서, 비로소 완전해지는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합니다. 마법 같던 시간도 이제 끝나가나 봅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처럼 새벽을 기다렸던 사진가들이 하나둘 장비를 챙깁니다. "오늘 그림 좋았죠?" 눈인사를 나누며 삼각대를 접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가방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다들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무언가 가득 채워진 듯한 만족감이 묻어있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다시 시끄러운 일상이 기다리고 있겠죠. 밀린 일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쏟아질 겁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안개가 걷혀도 제 마음속에 담아둔 이 고요한 풍경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소음이 버거울 때마다, 눈을 감고 오늘의 이 새벽 호수를 꺼내보면 되니까요.

삼각대를 어깨에 멥니다. 주머니 속 차 키를 만지작거립니다. 새벽 공기에 차가워진 손끝이 왠지 기분 좋게 느껴지네요.


📷 묵상을 담은 시선

· 촬영 장소: 충북 괴산군 문광면 양곡리 문광저수지 (은행나무 길)

· 촬영 시간: 오전 08시 09분 (세상이 안개에 잠긴 몽환적인 시간)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14, 셔터스피드 1/40s, ISO 100 (Canon 32mm 표준 화각)

· 이곳의 특징: 가을비와 안개가 만나는 날이면, 저수지는 한 폭의 수묵담채화로 변합니다. 물 위에 떠 있는 낚시 좌대가 안개 속에 섬처럼 희미하게 보이고, 노란 은행나무 잎만이 선명한 색채를 띠어 현실과 꿈의 경계를 걷는 듯한 신비로운 명소입니다.

· 촬영 팁: 짙은 안개를 활용하여 배경을 하얗게 비우는 '하이키(High-Key)' 기법으로 여백의 미를 살렸습니다. 위쪽의 은행나무 가지를 '프레임(Frame)'으로 활용해 시선을 안쪽으로 모으고, 투명 우산을 쓴 인물을 배치하여 빗소리가 들리는 듯한 서정적인 이야기를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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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교
빛과 마음이 머문 순간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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