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이 쉬어가는 자리

비스듬히 누운 고목이 견뎌낸 묵직한 숨결 <M-017>

거대한 늙은 나무가 짙은 녹색 이끼를 덮어쓴 채 비스듬히 뻗어 있고, 그 아래 보라색 맥문동꽃이 만발한 풍경. 자전거를 탄 사람이 묵묵히 지나가며, 삶의 무게를 견디는 묵직한 분위기와 조용한 위로를 전하는 숲길입니다.

"스윽, 툭." 오후 4시 20분, 짙은 그늘이 내려앉은 성주 성밖 맥문동 숲길. 출사를 마치고 카메라 가방 지퍼를 닫으려다, 수첩에 끼워둔 '모나미' 볼펜을 보라색 꽃밭 위로 실수로 떨어뜨렸습니다.

허리를 굽혀 펜을 줍는데, 욱신거리는 무릎 탓인지 명치끝이 뻐근해지며 꽉 막혀있던 한숨이 길게 새어 나오더군요. "아, 진짜 모임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싶다."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혼잣말에 저 스스로도 조금 놀랐습니다.

견뎌내는 무게에 대하여

사실 어젯밤 11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모임 장소를 예약하고, 회원들에게 일일이 안부 전화를 돌리느라 진을 다 뺐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거긴 음식이 짜서 별론데"라며 툭 던지듯 불평하는 문자 한 통을 받았습니다.

평생 교단에서 아이들을 다독이며 굳은살이 단단히 배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턱 밑까지 숨이 막히며 서운함이 밀려오더라고요.

고개를 들어 앞을 봅니다. 초록색 무거운 이끼를 잔뜩 뒤집어쓴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딱하게 누워있습니다. 저 묵직한 세월의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버티는 폼이 왠지 제 모습 같아 눈길이 떨어지질 않더라고요.

저 나무가 단단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쓰러지지 못해 억지로 허공에 매달려 있는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매일 이어지는 새벽 출사와 묵은 피로로 방전된 제 마음이 투영되어 저 고목마저 애처롭게 보이나 봅니다.

무너지지 않고 삐딱하게 버티는 일

비스듬히 누운 고목 아래로, 보라색 꽃물결을 가르며 자전거를 탄 사람이 무심히 지나갑니다. 휘어진 늙은 나무 아래로 매일 저렇게 각자의 무게를 싣고 묵묵히 페달을 밟으며 지나갔겠죠. 남몰래 서운함을 삼키는 이 헛헛한 마음, 저만 유난스럽게 겪고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솔직히 이 지독한 피로감을 어떻게 털어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비스듬히 누워서도 기어이 잎을 틔워내는 저 고목처럼,
오늘 하루를 버텨냅니다.

가방 옆 주머니에서 반쯤 남은 '목캔디'를 꺼내 입에 넣습니다. 매운 박하 향이 텁텁한 입안으로 훅 퍼지네요. 흙 묻은 볼펜을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다시 자박자박 흙길을 걷습니다.


더보기
  • 촬영 장소: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밖숲

  • 이곳의 특징: 199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귀중한 생태 자원이자 전통 마을 숲입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59그루의 거대한 왕버들(최고 높이 14m, 가슴직경 190cm)이 짙은 이끼를 두른 채 기괴하고도 신비로운 자태를 뽐냅니다. 예로부터 마을에 닥치는 재앙을 막기 위해 밤나무를 심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왕버들 숲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외부로부터 마을을 아늑하게 보호해 주던 이 숲은, 이제 나무 아래 융단처럼 깔리는 보랏빛 맥문동꽃과 함께 지친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위로를 건네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 촬영 시간: 오전 06시 41분. 울창한 왕버들 군락 위로 아침 해가 막 떠올랐을 때, 숲의 짙은 그늘 속에 서늘한 공기가 머물며 고목의 거친 질감과 이끼의 색감이 가장 차분하게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5.6, 셔터스피드 1/60s, ISO 640 (Canon 50mm 표준 화각)

  • 촬영 팁: 사람의 시선과 가장 편안하게 닮은 50mm 표준 렌즈를 사용하여, 비스듬히 누워 세월의 무게를 견디는 고목과 그 아래를 지나가는 자전거의 묵묵한 풍경을 과장 없이 진실하게 담아냈습니다. 울창한 숲의 이른 아침이라 빛이 부족한 상황을 고려해 ISO를 640으로 높이고, 셔터스피드를 1/60초로 확보해 흔들림을 방지했습니다. 조리개는 F5.6으로 설정하여 전면의 이끼 낀 나무의 질감을 뚜렷하게 살리면서도, 배경의 맥문동꽃과 자전거의 궤적을 부드럽게 표현해 냈습니다.

 

반응형
김정교
빛과 마음이 머문 순간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 저작권 안내
이 블로그의 모든 사진과 글은 작성자의 창작물입니다.
무단 복사, 재업로드, 2차 가공을 금합니다.
사용을 원하실 경우 댓글 또는 메일로 먼저 연락해 주세요. ateach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