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이 쉬어가는 자리

미지근한 커피의 온도와 수면을 스치는 얕은 날갯짓 <M-022>

안개 낀 고요한 호수 위로 가을 단풍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얕은 수면 위를 스치듯 나는 새와 가만히 서 있는 새가 평화롭게 머무는 풍경.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식어버린 커피 한 잔과 같은 작고 평범한 행복의 온기를 사색하게 하는 사진입니다.

"스윽, 툭." 오후 4시, 모니터 옆에 두었던 머그잔을 무심코 집어 들었습니다. 글쓰기에 빠져 타놓은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믹스 커피는 이미 층이 분리된 채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습니다. 달콤하고도 텁텁한 액체가 미지근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창문 너머로 옅은 햇살이 책상 위를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습니다. 

식어버린 커피와 새의 날개짓

저는 늘 대단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곤 합니다. 평생 아이들의 서툰 일기장을 다정하게 첨삭해주면서도, 정작 제 삶의 빈칸은 늘 거창하고 완벽한 정답으로만 채우려 헛돌 때가 많았습니다. 평범하게 반복되는 하루는 그저 지루한 숙제처럼 여겨, 저 멀리 있는 신기루 같은 행복만 좇아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지요.

목표를 향해 헉헉대며 걷다 보면 어느새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버리곤 했습니다. 쫓기듯 살아오며 텅 비어버린 속을 달래려, 며칠 전 새벽 출사에서 담아온 호수 사진을 가만히 화면에 띄워봅니다.

수면을 스치는 얕은 날갯짓

가을빛을 머금은 단풍나무 아래, 짙은 물안개가 내려앉은 호수. 그 위로 새 한 마리가 수면을 닿을 듯 말 듯 낮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하얀 새가 날갯짓도 없이 그저 가만히 물 위에 서서 흘러가는 시간을 덤덤히 지켜보고 있더군요.

저 멀리 희미하게 뻗어 있는 웅장한 다리보다, 수면을 맴도는 작고 가벼운 날갯짓 하나가 호수의 정적을 더 깊게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굳이 저 높고 까마득한 허공으로 비상하지 않아도, 얕은 수면 위를 맴돌거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새들은 충분히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어쩌면 숨 가쁘게 살아오며 작고 사소한 것들을 놓쳐버린 제 헛헛한 마음이 투영되어 저 풍경이 유독 뭉클하게 다가오나 봅니다.

미지근한 온기가 가르쳐준 것

행복이라는 건 단숨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환희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대단한 성취가 주는 벅찬 감동도 좋지만, 때로는 잊고 있던 식어버린 커피의 미지근한 단맛이나 퇴근길에 무심코 흘러나오는 옛 노래 한 곡이 텅 빈 속을 조용히 데워주기도 하니까요. 완벽한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 곁에 있는 작은 온기들을 모른 척 지나쳐 온 건 아닌지, 잠깐 고개를 숙였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힘을 빼고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애써 뜨거워지려 발버둥 치지 않으려 합니다. 미지근하면 미지근한 대로, 평범하면 평범한 대로 이 고요한 오후를 그냥 덤덤히 껴안아 봅니다.

잔 바닥에 남은 식은 커피를 마저 삼켜냅니다.

빈 잔을 책상에 '톡'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의 정적 속으로 느리게 흩어집니다.


더보기
  • 촬영 장소: 경북 안동시 월영교 (입구 대형 주차장 이용 가능)

  • 이곳의 특징: 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의 애틋한 사연과 아린 달빛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다리입니다. 산세가 병풍처럼 호수를 감싸 안아, 바람마저 잠시 숨을 죽이고 머물다 가는 고요한 곳이지요. 굳이 화려한 야경이 빛나는 밤이 아니더라도, 짙은 물안개 속에서 가만히 수면을 응시하다 보면 쫓기듯 살아오며 놓쳐버린 일상의 작고 평범한 온기들을 가만히 건져 올리게 되는 치유와 사색의 공간입니다.

  • 촬영 시간: 오전 08시 04분 (일출 후). 이른 새벽의 치열하고 뜨거운 일출이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호수 위로 부드럽고 미지근하게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입니다. 거창한 비상보다, 평범하게 이어지는 하루의 평화로움을 덤덤하게 담아내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14, 셔터스피드 1/4s, ISO 200 (Canon 40mm 표준 화각)

  • 촬영 팁: 사람의 편안한 시선과 가장 닮은 40mm 렌즈를 사용하여, 웅장한 다리의 전경을 뽐내기보다 수면을 스치는 작은 새들의 움직임에만 조용히 눈을 맞췄습니다. 주목할 점은 1/4초라는 다소 느린 셔터스피드입니다. 이 느린 호흡을 통해, 낮게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은 부드럽고 잔잔한 궤적으로 남기고 가만히 서 있는 새의 모습은 묵묵한 점으로 대비시켰습니다. 숨 가쁜 템포를 잠시 늦추고 미지근한 일상을 껴안으려는 글의 묵상을, 카메라의 셔터 속도로 탁월하게 표현해 낸 결과물입니다.
반응형
김정교
빛과 마음이 머문 순간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 저작권 안내
이 블로그의 모든 사진과 글은 작성자의 창작물입니다.
무단 복사, 재업로드, 2차 가공을 금합니다.
사용을 원하실 경우 댓글 또는 메일로 먼저 연락해 주세요. ateach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