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앗, 뜨거." 오전 7시 15분, 베란다에서 졸다가 손등에 맥심 모카골드를 살짝 엎질렀습니다.
끈적거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화분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며칠 전 사 온 노란 장미꽃 위에 엄지손톱만 한 달팽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더군요. 밤새 내린 비에 꽃잎이 온통 물구덩이인데도, 녀석은 미끄러질 듯 말 듯 더듬이를 뻗고 있었습니다.
6시 30분의 낙방 문자와 헛발질
어제저녁 6시 30분, 사진 공모전 낙방 문자를 받았습니다. "아, 진짜... 또 이러네." 벌써 세 번째 낙방입니다. 새로 산 카메라 렌즈 할부금도 두 달이나 남았는데 말이죠.
같이 응모했던 분은 ‘은상’ 받았다는 글을 올렸더군요. 좋아요가 300개쯤 붙어 있었습니다., 저만 엉뚱한 곳에서 헛발질하고 있는 것 같아 속이 꽤 쓰렸습니다. 꽃잎 위 물방울에 주르륵 미끄러지는 달팽이를 보니 꼭 제 꼴 같아서… 그냥, 좀 민망해졌습니다.
끈적한 자국이 지도가 될 때
저 녀석은 지금 저 장미 꼭대기가 얼마나 높은지 알고나 있을까요. 아니면 방금 미끄러진 자국이 치명적인 실패라고 자책이나 하고 있을까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껍질이 무거워서 느린 건지, 아니면 그냥 아침 산책 중인 건지. 아마 제 마음이 바닥이라 저 느릿한 발걸음이 유독 위태롭고 안쓰러워 보이나 봅니다.
가만히 보니 녀석이 남긴 끈적한 궤적은 떨어질 뻔한 흔적이 아니라, 어떻게든 다음 꽃잎으로 넘어가려 애쓴 지도 같았습니다. 원래 이 길은, 한 번에 올라가는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혼자 한 번에 꼭대기까지 날아가려다 제풀에 지쳐 씩씩거렸던 것 같습니다. 이게 맞는 걸까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실패라는 거창한 딱지 대신, 1cm짜리 작은 미끄럼틀을 탔다고 우겨볼까 합니다. 마음이라는 게 원래 좀 뻔뻔해야 덜 다치잖아요.
미끄러진 채로 맞이하는 아침
당장 내일이라고 대단한 걸작을 찍어낼 리는 없겠죠. 다음 공모전에서 또 미끄러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은 굳이 내일의 날씨까지 당겨와서 걱정하고 싶지 않거든요.
물티슈를 뽑아 손등에 묻은 커피 자국을 닦아냅니다. 베란다 창문을 조금 더 활짝 엽니다.
- 촬영 장소: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명주 테마파크 공원
- 이곳의 특징: 18,500㎡ 규모의 넓은 부지에 약 4만 그루, 100만 송이의 장미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화려한 생태 공원입니다. 인근에는 명주 박물관과 한국 한복 진흥원이 있어, 명주의 고운 결처럼 부드럽고 잘 정돈된 산책로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꽃송이들의 향연 속에서도, 한 걸음 멈춰 서서 들여다보면 빗물에 미끄러지면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가는 작은 생명들을 만날 수 있는 따뜻한 사색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 촬영 시간: 오전 06시 38분. 밤새 내린 비가 꽃잎에 투명한 물구덩이를 만들고, 세상의 잣대나 소음이 아직 닿지 않은 서늘하고 고요한 아침입니다. 남들보다 뒤처진 것 같아 조급해진 마음을 아침 공기에 가만히 식히며, 작은 궤적의 의미를 곱씹어보기 참 좋은 시간입니다.
- 카메라 설정: 조리개 F7.1, 셔터스피드 1/320s, ISO 250 (Canon 241mm 망원 화각)
- 촬영 팁: 100만 송이의 거대한 장미 군락 속에서, 241mm 망원 렌즈를 한껏 당겨 오직 꽃잎 위에서 분투하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에게만 온전한 시선을 내어주었습니다. 조리개를 F7.1로 설정해 위태로운 달팽이의 투명한 더듬이와 빗물을 머금은 장미의 결을 또렷하게 살리면서도, 복잡한 배경은 부드럽게 지워냈습니다. 1/320초의 셔터스피드로 미끄러질 듯 말 듯 느릿하게 이어지는 녀석의 그 끈질긴 '1cm짜리 궤적'을 흔들림 없이 포착해 낸 것이 이 사진의 진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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